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 1887년 [[런던]]에서 몽고메리 가의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앙리 2세]]를 [[마상창시합]] 중 실수로 죽이고 그로 인한 푸대접으로 [[위그노 전쟁]]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 후 처형당한 콩테 드 가브리엘 몽고메리 백작의 영국으로 망명한 후손이다. 아버지 헨리 몽고메리가 [[성공회]] 성직자였기에 금욕적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에 엄격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실질적인 집안의 가장은 어머니였고, 아버지는 주로 어머니에게 지시를 받는 등 집안에서 힘이 없었다고 술회한다.]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해 완고하고 거만한 성격이 되었다. 특히 어머니의 무심함은 그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으며, 훗날 버나드 몽고메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손자인 데이비드와 만나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다.[* 젊은 시절 어머니가 대가족의 모든 가사를 책임지느라 힘겨워했고 그래서 규칙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으로 그 어려움에 대처해야 했는데, 유독 몽고메리는 그런 어머니의 권위와 목적에 자주 충돌했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은 성격 면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은 그였다는 것. 이렇게 우중충한 소년기 및 청소년기를 보낸 후 [[영국육군사관학교|왕립 군사 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왕립 워윅셔 연대 1대대의 보병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한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보병 소대장으로 참가하였다. 몽스 전투에서 대대의 절반이 소멸하고, [[국경 전투]]에서 오른쪽 폐에 총알이 박히고 무릎에도 적탄이 관통하여 사경을 헤매는 경험을 하는 등[* 그 당시 모두 몽고메리가 곧 죽으리라 생각했고, 죽은 뒤 묻을 무덤까지 파놓았다고 한다(...).] 여러 지옥도에서 살아남았다. [[전간기]]에는 보병방어전술에 대한 책을 저술하여 영국군 내에서 어느 정도 반향을 이끌어 냈지만 당시 영국 육군의 화두는 [[전차]]였기 때문에 그의 저작은 상대적으로 묻혔다. 1925년 [[브르타뉴]]에서 휴가를 지내던 중 사랑에 빠졌는데 베티 앤더슨이라는 17세의 금발미녀였다. 당시 39세였던 몽고메리는 그녀에게 열심히 작업을 걸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의 형인 브라이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몽고메리는 그녀에게 장갑전투차량을 활용하기 위한 자신의 개념을 모래에 그림으로 그려가며 보여줬다고 한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부모와 함께 [[스위스]]의 렌크(Lenk)라는 곳에서 스키 휴가를 보낼 것이란 소식을 듣고 그는 그들이 묵을 장소를 알아내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앤더슨은 베티 카버(Betty carver)라는 여성을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몽고메리와 비슷한 연령대의 미망인으로 12세와 13세인 두 아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몽고메리는 그녀와 그녀의 두 아들과 함께 친구가 되었고 1927년 둘은 결혼했다. 그들은 10년간 결혼생활을 이어나갔고 이듬해 외아들 데이비드[* 1928~2020, 아버지 작위를 물려받아 2대 당주가 되었다. 3대 당주는 데이비드의 1남 1녀중 장남인 헨리(1954년생)인데, 딸만 셋을 두었다.]가 태어났다. 1937년 아내가 벌레에 물린 상처로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자 몽고메리는 평생 재혼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